말씀으로 사는 삶 - 5월 12일(수)
2021.05.12
<생각하기>
이 대화에서 무엇이 문제입니까?
신애의 입장이 아닌 구원받은 유괴범의 입장에서 문제를 살펴봅시다.
속건제사의 관점에서 보겠습니다.
남의 아들을 죽여 놓고 피해자 앞에서 살인자가 너무나 태연하게 자기구원을 말해도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셔서 평안하다...
남의 자식 생명을 앗아갔는데...
남의 생명의 대가를 통해 참신을 만났는데, 그 신이 모든 것을 용서했다..
이는 오늘 본문에서 5절 없이 6절로 건너 뛴 것입니다.
즉 무엇입니까?
살인죄와 관련해서는 무효이고, 아직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영적 구원을 이용한 자기의 뻔뻔함입니다.
신애가 통곡의 나날을 보내는 동안, 범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할 수 없는 평안을 누리고 있었노라고 말해도 되는 것입니까?
이 살인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하면서,
피해자인 이웃이 베풀어야 할 용서를 하나님의 용서를 빙자해서 피해자가 가진 용서의 권리를, 무용지물로 전락시켜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죄용서함을 이용하여 이웃에게 갚아야 할 대가를 셀프용서 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가해자가 스스로 용서받았다고 해 버렸으니... 피해자인 신애는 용서하고 말고가 없게 되어 버린 것이지요.
사람을 죽여 놓고, 상처주고는, 미안하다고 말한다고 다가 아닙니다.
그리고 “피해자의 고통과 사후는 그건 하나님께 맡기자”라고 가볍게 말해서도 더더욱 안됩니다.
범인은 신애 앞에서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기 전에,(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기 전에)
7절의 사함을 받으리라를 말하기 전에,
5절에 속건행위, 사죄구함이 있어야 했습니다.
피해자에게 무릎 꿇고 빌어야지요,
진심으로 사죄하는 눈물을 흘려야지요.
‘당신의 아들이 생각나는 고통 때문에 울분이 생긴다면 저를 쳐도 좋습니다. 저를 욕하고 저를 때려도 좋습니다.
그래서라도 당신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적어진다면 저는 기꺼이 당신의 발길짓과 욕설을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먼저 말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 유괴범은 구원받은 신자일 수는 있어도,(물론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만.) 허나 진정한 속건제사의 정신과 이웃사랑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오네시모는 되지 못한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말하기 전에 최선을 다해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했어야만 했습니다.
즉 6절, 7절을 말하기 전에 5절이 있어야 했습니다.
참된 속건제사란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저 자신의 죄만 용서 받고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피해자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고 참회하며 피해자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피해자를 찾아가서 그 물건을 돌려주고 5분의 1을 더한 이자를 쳐주고 그 후에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리라고 하는 하나님 속뜻이 아닙니까?
-이것이 물건보다는 사람과의 관계를 더 중시하는 속건제의 본정신 아닐까요?
-이것이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제일되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예배와 삶에서의 일치를 동일시하는 하나님의 속건제 정신 아닐까요?